호스피스-완화의료의 윤리
그런데, 우리나라의 의료 현장에서도 오래 전부터 유사한 문제가 있어 왔으나, 제대로 된 사회적 논의가 없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1997년의 보라매병원 사건과 2003년 아버지가 딸의 인공호흡기 전원을 제거한 사건이 있었다.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들의 특징을 요약하면 1) 가족들의 의사결정에 ‘경제적 동인’이 깊게 개입되어 있고, 2) 환자 본인의 ‘자의적 의사 표현’에 대한 고려가 없다
환자가 임종하는 과정에 의료인이 택할 수 있는 선택은 두 가지 극단적인 상황이 있다. 한가지 극단은 환자의 고통을 들어 주기 위하여 ‘안락사’를 시행하는 것이고, 또 다른 선택은 환자나 보호자가 원하는 데로 “끝까지” 연명장치를 적용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나라의 의료현장에서 ‘안락사’는 문제가 되고 있지 않으며, ‘의료집착적 행위’에 과잉으로 노출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무의미한 연명치료’는 환자가 치료를 통해 더 이상 이익을 얻을 가능성이 없는 치료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환자는 단순히 장기들의 집합체이거나 개인적인 욕구에 집착한 인간이 아니다. 의사가 자신의 질병을 치유해 주기를 바라는 정신과 육체를 동시에 지닌 전체로서의 한 인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절대적인 의료’의 시대에서 ‘환자의 생명에 대한 가치관’을 고려해야 하는 ‘가치중심의 의료’의 시대로 의료의 paradigm이 바뀌고 있음을 의료현장에서 종사하는 사람이외에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폐렴환자에게 항생제는 필수적이다. 항생제를 사용하지 않을 경우 치명적(회생 불가능)이지만, 항생제를 적절히 사용할 경우 환자를 회생시킬 수 있다. 물론, 항생제의 부작용으로 손해를 보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지극히 드문 현상이다. 달리 표현하면, 항생제의 사용으로 환자에게 끼치는 영향은 99.999%이상의 이득과 0.001%에도 미치지 못하는 손해볼 가능성을 비교하여 결정하게 되는 절대적인 의료행위이다. 따라서, 이 같은 상황에서 의사의 결정과 행동은 ‘절대적’이고, 무한 책임을 지닌다. 이 같은 의학적 결정은 흑백논리로 판단이 가능하며, ‘회생가능’, ‘회생불가능’으로 이원화시킬 수 있다.
지금 진료 현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의학적 결정은 그렇지 못하다. 인위적으로 인체의 기능을 조절할 수 있는 연명장치가 급속히 발달하면서, 회생가능성의 예측이 대단히 어려워졌다. 회생가능성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둘 중 하나의 답을 법이나 사회는 요구하고 있지만, 실제 진료현장에서는 회생가능성의 판단이 100% 와 0%로 명확히 구분되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대부분 일정 확률로 가능성을 예측해 볼 수 있을 뿐이다.
회생가능성의 판단은 대단히 어렵다. 또, 1%의 가능성이 있을 때, 이를 30%의 가능성과 똑같이 가능성이 있다고 볼 것인지, 회생 불가능한 것으로 볼 것인지를 담당의사가 아닌 법이 결정한다면, 엄청난 혼란이 올 것이다. 왜냐하면, 많은 임상연구에서 중환자 관리의 전문가조차도 환자의 회생가능성 예측의 정확도가 80%를 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연명가능성’여부는 ‘회생가능성’과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연명치료’ 중단 논의에서 ‘회생가능성’과 별도로 ‘연명가능성’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이 같은 결정들은 환자자신의 생명에 대한 가치관에 근거한 판단이어야 하며, 환자를 제외한 채 보호자와 의사만이 상의해서 결정한다면 많은 문제를 야기할 것이다. 따라서, 불치병의 본인에 대한 통보문화의 정착이 전제되어야 한다. 따라서, 법으로서만 모든 문제가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며, 문화적으로도 성숙되어야 한다.
‘무의미한 연명치료의 중단’은 ‘자연사법’ 혹은 ‘존엄사법’의 형태로 대부분의 나라에서 합법화하였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무의미한 연명치료의 중단’을 ‘소극적 안락사’로 잘못 받아 들이고 있다. 또, 회생 가능성이 희박한 환자를 의사들이 포기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시도로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무의미한 연명치료의 중단’의 근본 취지는 회생이 희박한 환자가 무의미한 치료를 거부하는 의사를 밝힐 때, 이에 상응해서 의사가 연명치료를 하지 않을지라도 죄를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회생가능성이 높은 환자 상황에서의 논란은 의료적 문제라기 보다는 사회복지제도의 문제이다. 또, 회생가능성이나 연명가능성이 희박한 환자는 호스피스제도의 대상이다. 그 중간의 환자들에 대해서는 연명치료문제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임종과정에서 의료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결정으로 ‘안락사’ 나 ‘의료집착적 행위’는 모두 옳지 않은 것이다. 무의미한 연명치료의 중단을 통해 환자들이 불필요한 고통에 노출되지 않고 편하게 임종을 맞을 수 있는 ‘자연사’ 혹은 ‘존엄사’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며, 이를 의료현장에서 실천하는 호스피스-완화의료에 대한 제도적지원이 절실히 요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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