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의사들의 사회학
후생신보 기사입력  2015/11/20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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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한수 前 대한전공의협의회 정책이사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종합병원에서 봉직 생활을 몇 년 하고 있으니 주변에서 개원에 대한 제안을 나에게 종종 한다. 몇몇은 본인이 아는 자리를 소개시켜주고, 몇몇은 동업을 제의하기도 한다. 좋은 자리가 났다고 귀띔해주는 중개업자도 있다. 그 중에는 정말 탐나는 자리도 있고, 지금 바로 들어가야만 할 것 같은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자리도 있다. 하지만 찰나의 고민일 뿐, 이내 생각을 접는다. 개원을 포기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개인적으로 불안정성을 추구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기도 하고 종합병원에서 입원 환자를 보는 것이 더 좋기도 하다.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개원에 대한 두려움이다. 얼핏 계산을 해봐도 나의 진료 스타일로는 개원가의 손익을 맞추기 힘들 것 같다. 극도의 저수가 문제는 이미 익숙해져버렸고, 예방접종이나 각종 비급여항목 조차도 같은 의사들끼리 덤핑을 해가며 치킨 게임(chicken game)을 계속하고 있다. 이 쯤 되면 개원가에서 묵묵히 진료하는 원장님들이 존경스러울 지경이다.

 

여러 사회 경제학 이론들은 의사들의 사회에서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대표적인 예가 '약탈적 가격책정(predatory pricing)'이다. 다소 논쟁의 여지는 있으나, 과거 인텔이 경쟁사인 AMD와 거래하지 않을 것을 조건으로 PC제조사들에게 리베이트를 제공한 사례, 대형마트에서 수익보다는 손님을 끌어들이기 위한 목적으로 통큰치킨을 싸게 판매한 사례가 이에 해당된다. 즉, 경쟁사를 배제하고 진입장벽을 높이기 위해 불공정한 거래행위를 하는 것을 뜻한다. 일부 병의원들의 "독감 예방접종 1만5천원" "MRI 25만원"과 같은 홍보문구를 볼 때면 이것 역시 약탈적 가격책정의 일종이라 느낀다. 그러한 가격으로 현실적인 수익을 얻기는 힘들다.

 

결국 일종의 미끼 상품으로 주변 병의원으로부터 환자를 뺏어오기 위한 행위일 뿐이다. 물론 일정한 수가를 바탕으로 상당수의 수익이 이루어지는 진료행위를 공정거래법 상 부당염매로까지 연결 짓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달려 충돌이 우려될 때 상대방이 피하기를 바라면서 마구 뜀박질을 하는 것보다는, 그냥 둘 다 서로를 피해 가는 것이 가장 최선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 하나의 경우를 보자. 어떠한 식물이 잘 자라기 위해서는 여러 종류의 영양분이 적당한 비율로 공급되어야한다. 특정한 영양이 부족하면 그 식물은 잘 자라지 않게 되고, 설령 다른 종류의 영양을 실컷 공급해도 부족한 특정 영양을 보충하기 전까지는 식물의 성장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를 독일의 화학자 이름을 따서 '리비히의 최소양분율의 법칙(Law of minimum nutrient)' 이라고 한다. 이는 경제학이나 조직학에서도 많이 응용되었는데, 조직의 수준을 올리기 위해서는 이미 충분한 수준에 있는 조직원들을 더 올리기보다는 '가장 힘든 조직원들'을 끌어올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해석된다. 의사들도 더 이상 모든 영양이 풍부한 집단이 아니다. 경영난에 힘들어하는 수많은 개원의들이 부지기수다. 힘들게 수련과정을 거쳤지만 전공을 살리지 못하는 의사들도 많다. 전체 의사의 권익을 상승시키고 싶다면, 이처럼 힘들어하는 의사들을 우선적으로 옹호해야한다. 댐을 아무리 높고 튼튼하게 쌓아도 몇 개의 벽만 높이가 낮아도 물을 많이 담을 수 없는 법이다.

 

얼마 전 의료계 숙원 사업 중 하나였던 차등수가제 폐지가 실현되었다. 진작 없어졌어야 할 비상식적 제도였지만 끈질기게 버티다가 비로소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당연히 축하할 일이다. 하지만 차등수가제 폐지가 '가장 힘든 조직원들'을 끌어올리지는 못할 것 같다. 적은 환자 수로 근근이 버티는 개원의들에게 하루 100명 이상, 적어도 75명 이상 진료 시에 적용되는 차등수가제는 어쩌면 먼 나라 이야기였을 수도 있다. 결국 그들을 위해선 진료 수가의 획기적 변화나 의료전달체계의 개선, 건강보험 시스템의 변화가 필요하다.

 

흔히 현실을 크게 변화시키고자 하는 관점을 진보주의(progressivism), 현실에 안주하면서 타협과 조율을 통해 안정적인 움직임을 추구하는 것을 보수주의(conservatism)이라고 한다. 지금 대한민국 의료현실에 요구되는 사회 관념은 과연 어느 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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