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나는 전문가다
후생신보 기사입력  2015/03/06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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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한수 前 대한전공의협의회 정책이사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주변에서 몇 차례 경험담을 듣기는 했지만, 실제로 내가 겪어보기는 처음이었다.
 
얼마 전, 나름 라포르(rapport)가 잘 형성되어있었던 보호자 한 명이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진료실로 들어왔다. 모세기관지염 진단 하에 경구 약을 복용하며 경과관찰 중이던 15개월 여자 아이의 보호자였다.
 
그 분은 나에게 “선생님, 2세 미만 아이들한테 금기로 된 약을 처방해주시면 어떻게 해요” 라며 원망스러운 말투로 내게 따졌다. 드디어 나에게도 올 게 왔구나. 무슨 소리인지는 묻지 않아도 뻔했다.
 
작년 가을, 한국소비자원이 만 2세 미만이 먹어서는 안되는 약이 처방되고 있다고 보도 자료를 낸 이후 전국의 소아청소년과 의사들이 종종 듣고 있던 항의였다.
 
한국소비자원의 말에 따르면, 상당수의 항히스타민이나 슈도에페드린은 물론 심지어 암브록솔까지 거의 대부분의 상기도 증상 완화제가 만 2세 미만 아이가 복용해서는 안될 약인데 의사들이 무분별하게 처방하고 있다고 하였다. 아이들 약 처방에 민감한 보호자들은 그 약 이름들을 스마트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서 가지고 다닐 정도였다.

물론 어린 아이들 처방에 주의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어쩌면 그렇기에 소아청소년과 의사가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소아청소년과 의사들은 동료 의사들에게 “우리 애가 감기에 걸렸는데 무슨 약 처방하면 될까?”라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단순한 감기약 하나 처방에도 굳이 소아청소년과로 문의하는 걸 보면 그만큼 소아청소년과 의사들이 아이들 약 처방에 있어 전문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리라.

하지만 한국소비자원의 발표에서는 그런 전문성에 대한 존중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예를 들어 언급되었던 약 중에 상당수는 2세 이상에서는 권장 용량이 정해져 있으면서 2세 미만에서는 ‘의사의 판단에 의함’이라고 적혀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의사의 판단에 의한 처방조차도 ‘의사들이 안전성이 부족한 약을 마구 처방하고 있다’는 한국소비자원의 말에 의해 매도되었다. 어째서 비전문가들이 의사들의 처방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인플루엔자, 노로바이러스 장염, 유행성 결막염 등등 유행성 질환이 퍼질 때 즈음이면 방송사 뉴스에서는 이에 대한 뉴스를 보도하며 주의를 당부한다. 그러면 대개 해당 분야 전문의가 인터뷰를 하며 “외출 후 손을 잘 씻으셔야 합니다.”라고 하는 이야기를 한다. 외출 후 손을 잘 씻어야한다는 기본적인 내용을 굳이 해당 분야 전문의에게 인터뷰하는 까닭은 그 의사가 전문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인터넷으로 온갖 정보가 범람하는 세상이고, 원한다면 검색 몇 번으로 얼마든지 원하는 내용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수많은 정보들 중에 어떤 것이 검증된 것이고 어떤 것이 적절하지 않은지 판단하는 것은 전문가의 역할로 여전히 남아있다. 아니, 오히려 그 역할은 증대하고 있다. 진료실에서 “제가 인터넷으로 찾아보니까...”라는 말로 운을 띄우며 시작하는 환자의 온갖 이야기에 대해 진위 여부를 일일이 파악해줘야 하니까.

이러는 와중에 지난 소비자원의 발표는 매우 용감하다 못해 무모했다. 어느 누군가가 백과사전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만물박사가 되진 못한다. 의학 교과서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의사가 되지도 못한다. 하물며 약품 설명서 한 두 번 읽었다고 전문가가 될 리가 만무하다. 한국소비자원의 전문가 행세로 인해 그 피해는 환자들과 의사들이 입고 있고, 정작 문제를 일으킨 기관은 침묵하고 있다.

참고로 서두에서 나에게 문제를 제기했었던 그 보호자에게 난 위와 같은 이야기를 전했었다. 아마 한국소비자원에게 화가 나서인지 꽤 상기된 목소리로 설명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이후 나에게 자주 오던 한 명의 환자를 난 더 이상 내 외래에서 볼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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