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진 교수의 눈 이야기 -139
후생신보 기사입력  2014/12/27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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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풀
 
전공의 1년차는 삼신 할아범입니다. 별로 힘들 것 같지 않은 안과도 1년차는 여지없습니다. 먹는 데 걸신, 자는 데 귀신, 그리고 아는 데 병신. 1년차 기간 중에 주말만 빼고 5시간을 자면 잘 잔겁니다. 당시 점심 식사 후 10분간 잠을 자지 않으면 저녁 일이 힘들어집니다.

밤 11시가 되면 잠 귀신이 슬슬 몰려옵니다. 환자 기록과 다음 날 수술 준비에 속도를 냅니다. 이러다가 12시 전에 일이 끝나는 것 아니야? 그러나 잠귀신은 12시에 잠을 자게 놔둘 만큼 너그럽지 않습니다. 혹시 일을 일찍 마치고 12시에 잠을 자게 되면 너무 호사에 겹다고 생각한 잠귀신이 심술을 부립니다. 역시 조금 깊은 잠에 빠져들라고 하면 전화벨이 울립니다. 1시. 응급실.

천안 병원 응급실을 가려면 병원 이쪽 끝 꼭대기 숙소에서 두 개의 건물을 지나 저쪽 끝 건물 1층까지 가야 합니다. 가다가 예쁜 병동 간호사가 심전도 검사가 펑크 났으니 좀 해 달라고 조르면 안 해 줄 수도 없습니다.
 
예쁜 간호사에게 심술을 부려 밉보이고 싶은 남자는 많지 않으니까요. 다행히 잡는 간호사가 없습니다. 졸린 눈을 반쯤 감으며 터벅터벅 걷다보면 어느 새 잠귀신이 달아나고 있습니다. 달아나면 안 되는데. 이따가 올라가서 다시 자야 하는데... 합창반 후배 인턴 선생이 반갑게 인사합니다. 그런데 하나도 안 반갑습니다.
 
“힘들지? 무슨 환자?”
“눈에 풀이 들어갔답니다.”
“무슨 풀. 이 밤에?”
“속눈썹 붙이는 풀이요.”
“속눈썹?”
“네. 20대 예쁜 여성이에요.”

인턴 선생이 ‘예쁜’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야 질문이 끝나는 줄 알고 있는 겁니다. 환자를 먼저 만나볼까 하다가 그렇게 하면 ‘예쁜’에 넘어가는 게 눈에 보이는 것 같아서 쿨 하게 “2층 외래로...” 하고는 2층으로 향합니다. 어차피 세극등현미경이 있는 곳에서 봐야 하니까.
 
정말 예쁜 숙녀였어요.
“처음이세요?”
“네? 네.”
머뭇거리다가 이 밤중에 와서 미안하다는 표현을 대신하기라도 하듯 본인의 사정을 이야기 합니다.
“첫 선이에요. 친구가 첫 선 때 예쁘게 보이려면 속눈썹을 붙이라고 해서... 오늘 샀거든요.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잠이 안 와서 한 번 해 보자고 하다가 잘 못해서 눈에 들어갔어요.”
“...”
“정말 아파요.”
 
마취 안약을 넣으니 통증이 사라져서 표정이 풀렸습니다. 소독 면봉으로 풀을 제거하니 그 부위가 화학약품 때문에 찰과상이 생겼습니다. 각막 찰과상은 우리 몸에서 느끼는 통증 중 가장 괴로운 통증을 일으킵니다. 항생제연고를 넣어주고 압박안대를 해 준 후 “오늘 밤만 지나면 좋아질 겁니다.”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저녁에 하세요.” 하자 웃으면서 고개인사를 하고 떠났습니다. 숙소에 올라가면서 ‘언젠가 나도 예쁜 애인을 만날 수 있을까?’ 꿈을 꾸었지요. 별도 많이 떴습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잠 귀신도 달아났습니다. ‘내일 힘들겠군.’
 
그녀는 그 후로 저녁에 두 번을 더 왔습니다. 눈이 아프다고 거의 울면서 말입니다. 세 번째 올 때는 샌드위치를 사 와서 안대를 한 채 같이 먹을 정도로 정신은 남아있었습니다. “이 번에는 성공할 뻔 했어요.” 그 후로 그녀를 보지 못했습니다.
 
속눈썹을 더 이상 붙이지 않았거나 속눈썹 붙일 때 풀을 눈에 떨어뜨리지 않았거나 했겠죠? 한 번 쯤 올만 한데. 한 번만 더 오면 어디 사는 지 한 번 물어 볼 텐데. 혹시 제가 서울병원으로 옮긴 후 찾아오지는 않았을까요? 천안 응급실 하면 속눈썹 안 붙여도 예쁜 그녀가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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