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명목주의
후생신보 기사입력  2015/01/09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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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한수 前 대한전공의협의회 정책이사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과거 인종차별, 여성차별 등을 극복했던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사례에서 빠질 수 없는 주제가 명목주의(tokenism)다. 명목주의란 형식적으로는 합리적인 대우를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차별과 같은 불합리성이 존재하는 상태를 뜻한다.
 
예를 들어 한 기업이 신입사원을 채용하는 과정에서 소수의 여성을 상징적으로 고용한 후, 정작 그들에게 무의미한 잡일만 시킨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나서 그 기업이 대외적으로 “우리는 인재 채용 분야에서 남녀평등을 지향한다”라고 주장한다면 과연 그 말에 공감할 수 있을까? 남녀평등의 근본 정의는 성별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는 것이다.
 
단순히 여성 몇 명을 고용하는 표면적 모습으로만 남녀평등을 주장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명목주의일 뿐이다. 남녀평등의 근본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는 성별이 아닌 능력에 따라 평가받고 인정받아야 하는 법이다.

명목주의라는 단어를 굳이 언급한 이유는 최근 전공의 근로환경 개선 관련 기사들을 보면서 이 단어가 자꾸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난 2012년부터 2013년까지 보건복지부 의료자원정책과 주최로 대한전공의협의회, 대한병원협회 등이 참여한 ‘전공의 수련환경 개선 TFT’ 회의가 수 차례에 걸쳐 이어졌다. 그리고 격론 끝에 주 80시간 이내로 전공의 근로시간을 제한하는 등의 수련환경 개선안이 도출되었다.
 
당시 그 회의에 직접 참여했었던 기억에 따르면 회의의 초점은 회의 제목처럼 ‘전공의 수련환경 개선’에 있었다. 전공의란 전문의가 되기 위해 수련 과정에 있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훌륭한 전문의가 배출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전공의 수련환경 개선의 방향이었다.
 
따라서 무작정 근로시간을 주 40시간 미만으로 줄여달라고 요청하거나 단순히 일을 편하게 하고 싶다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살인적인 근로시간을 줄이면서 점차적으로 최적의 전공의 수련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여 다른 문제들도 같이 해결해나가자는 것이 그 회의의 주제였다. 주 80시간의 근로시간 상한제 역시 수련환경 개선을 위한 최소한의 수단일 뿐, 최종 목표가 아니었던 셈이다.

그로부터 2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후생신보를 비롯한 여러 매체를 통해 전공의 수련환경 개선안이 보도되었고 많은 관계자들이 알게 되었다. 국회를 통한 입법화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최근 들리는 전공의 수련환경 개선 소식은 암울하기만 하다.
 
2014년 12월에 대한전공의협의회가 발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80% 이상의 전공의들이 "개정안 이전에 비해 근로시간이 줄어들지 않았다"라고 답변하였다. 여전히 전공의들의 평균 근로시간은 주당 100시간을 넘고 있으며(100.3 시간 , 2014년 4월 대한전공의협의회 조사), 심지어 44.5%의 전공의들은 “개정안 이후 수련 현황표를 거짓으로 작성하도록 강요받았다”라고 토로하였다.
 
일부 수련 병원들에서 일종의 명목주의에 사로잡혀 주 80시간이라는 껍데기만 따라하면서 근무시간을 형식적으로 맞추거나 조작하고 있는 것이다. 훌륭한 전문의가 배출될 수 있도록 전공의 수련환경을 개선해나가자는 본질은 온데간데없고 오히려 수련 수준을 낮추고 있다.

이러한 뒷걸음질에도 불구하고 나는 미래를 기대해볼만한 세 가지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희망은 최근 고등법원까지 판결이 난 전공의 당직비 지급 소송 건이다. 해당 병원에서 대법원 상고를 포기함에 따라 사실상 확정 판결이 난 것으로 보여진다. 대한전공의협의회 주도로 진행이 되었던 이 소송에서 전공의가 승소함에 따라 전공의의 근로자로서의 권리가 재확인되었으며 당직 수당을 근로기준법에 따라 지급하는 것 역시 당연한 이치임을 보여줬다.
 
판결을 통해 그동안 암묵적으로 묵인해왔었던 전공의의 비인간적인 과도한 근무가 더 이상 “몇 년 만 고생해라. 다 거쳐 가는 과정이다”라는 이유로 정당화될 수 없음이 명확해졌다. 판결 이후 대한전공의협의회에서는 소송에 대한 일종의 가이드라인까지 제시하였다. 이제 전공의의 근로시간을 완화하는 것은 하나의 흐름이 될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희망은 일부 병원에서 시도하고 있는 호스피탈리스트(hospitalist) 제도의 도입이다. 미국 등 많은 나라에서 '입원환자 전담 전문의'로 보편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제도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공식 우리말 명칭조차 없을 정도로 낯설다. 하지만 전공의 근로시간 단축 의무화와 함께 2015년도 내과 전공의 모집 미달 사태까지 벌어지며 궁여지책으로 호스피탈리스트 제도가 떠오르고 있다.
 
이미 몇몇 대학병원에서는 호스피탈리스트 역할을 담당할 의사를 채용하기 시작하였고, 내과학회에서도 이를 적극 지지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힘을 받고 있는 모습이다. 물론 병원 입장에서는 새롭게 의사 몇 명을 더 채용해야한다는 경영상 부담감이 있겠으나, 전공의의 부담을 덜어주고 환자에게도 안전한 진료 환경을 제공하며 의사들의 봉직 시장을 다양화 시킬 수 있는 등 여러 장점들을 가지고 있어 호스피탈리스트를 임시방편으로 운영하기보다는 장기적 안목을 가지고 확대해 나가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세 번째 희망은 전공의 수련 교육에 대해 정부의 공공 재정 지원을 확대해야한다는 요구가 커가고 있다는 점이다. 앞에 언급한 호스피탈리스트 채용과 그 맥을 같이 하는 내용으로, 결국 전공의들의 근로환경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경제적 지원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의 저수가 체제 속에서는 그 해답을 찾기 어렵다. 이러한 상황에서 외국의 사례들이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다.
 
캐나다 미국 일본 등의 나라에서는 전공의 수련교육비용을 직,간접적으로 정부가 부담한다. 이와는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각각의 수련병원에서 부담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우리나라의 전공의는 수련병원에서 일하는 한 사람의 저임금 근로자로서의 역할이 유독 강조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전공의는 전문의가 되기 위해 수련하는 사람이다. 병원 내 경영 악화를 모면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공의를 이용하는 일부의 행태를 막기 위해선 전공의 수련교육의 공공성이 보장되어야한다. 정부에서 전공의 수련교육에 재정을 지원하면서 수련 교육의 질을 관리감독 해야할 것이다. 이는 단순히 한 사람의 의사를 전문의로 만들기 위한 과정만이 아니라, 과도한 전공의 근로 환경으로 인해 환자 안전까지 위협받는 현실에 대한 해결책이기도 하다. 전공의 수련 교육의 공공성을 더욱 더 공론화해나가길 희망한다.

갈수록 악화되어가는 의료계의 현실을 반영하듯 전공의 수련환경 역시 벼랑 끝에 서있다. 메이저 과의 몰락과 전공의 수급 미달 사태를 바라보면서도 그 해결 방안은 막막하기만 하다. 의료계의 여러 고질적인 문제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발판이 필요하다. 전공의 수련환경 개선을 시작으로 그 악순환이 선순환으로 바꿔지기를 고대해본다. 전공의는 의료계의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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