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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진 교수의 눈 이야기 -134

후생신보 | 기사입력 2014/11/13 [12:51]

이성진 교수의 눈 이야기 -134

후생신보 | 입력 : 2014/11/13 [12:51]
멱살을 잡힐 때
 
그 날은 발표가 있었습니다. 발표가 있는 날은 1년차에게 힘든 날입니다. 안과는 특성상 힘들어도 티 내지 말아야 합니다. 외래에 하루 종일 붙어서 검사도 하고, 진료 보조도 하며, 입원 환자들을 잊지 말고 찾아다녀야 합니다. 거기에 병원평가 시기까지 겹치면 끝없는 숫자 자료와 씨름하여 산더미 같은 서류들을 만들어야 합니다. 모든 의사들이 마찬가지지만 인생에 가장 힘든 시기는 바로 1년차입니다.
 
아직 일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머리는 아프고 몸은 무겁습니다. 일 처리가 진행이 안 됩니다. 어제 발표 준비를 하느라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후유증입니다. 엎친대 덮친 격으로 그 날은 당직이기도 합니다. 또 다른 동료 닥터신은 오늘 데이트하러 나갔습니다. 애인도 없는 저는 그 친구가 부럽습니다. 자정이 넘었습니다. 세수를 하고 병원평가 자료를 2시간만 검토하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때 응급실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애기입니다. 아빠가 잘못해서 애기를 놓쳤고, 애기는 책상 모서리에 이마를 찧었습니다. 보호자들이 성화니 빨리 와 달라는 인턴선생의 목소리가 전화기를 통해 들려옵니다. ‘하필이면 지금이람. 최대한 빨리 처리하고 와야 된다.’ 속으로 다짐합니다. 한 살짜리 애기의 이마에 피 묻은 작은 거즈가 붙어있습니다. “오셨어요? Skull 사진에는 문제가 없어요. 1.5cm 열상이 있어요.” 인턴 선생이 인사하며 간단히 요약해 줍니다. “봉합해야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요.” “그럼 봉합할 것 준비 좀 부탁해. 난 보호자를 만날테니...”
 
애기 아빠가 같이 왔습니다. 젊은 애기 아빠는 척 봐도 얼굴이 흰 부자집 도령처럼 생겼습니다. “우리 애기 어떤가요.” “뼈는 괜찮은 것 같아요. 그래도 모르니 오늘 밤에 보채지 않는지 잘 보세요. 그나저나 이마는 두 바늘 봉합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조금 벌어지는 것 같아서요.” “그냥 두면 안 될까요? 애기가 아플 것 같은데요.” “벌어진 채로 아물면 흉터가 크게 생길 것 같아요. 봉합하지 않으시겠어요?” “이런... 곤란해요. 허락을 받아야 하거든요.” “네? 애기 아빠 아니세요?” “맞아요. 그래도 그런 중요한 일은 가족들과 회의를 해서...” 이런. 오히려 내가 곤란해졌습니다. 빨리 해결해야 할 일들이 마음을 짓눌렀지요. 그래서 재촉을 했습니다. “그럼 빨리 가족들에게 연락을 해 보세요.” “지금 연락을 했어요. 오신다니까 조금 기다려 주세요.” “지금 병동에서 일을 하고 있을 테니까 보호자가 오시면 연락을 주세요.” 하고 올라갔습니다.
 
조금 후 연락이 왔습니다. 아내가 왔답니다. 내려갔더니 초조한 아내가 같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봉합하는 건 결정하셨나요?” “아직이요. 혹시 마취는 어떻게 하나요?” “재우는 약을 먹이고, 국소마취를 하고, 혹시 모르니 아빠가 잡고 하면 됩니다. 금방 끝날 거에요. 흔히 하는 일이거든요.” 그러나 아빠가 미적거리고 있었습니다. “누가 또 오시나요?” “네. 애기 할아버지요.” “할아버지가 오셔야 애기 안면부 열상의 봉합을 결정할 수 있다는 얘기는 아니겠지요?” “예. 아니. 맞습니다.” 이런. 벌써 어영부영 1시가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뭐 이런 보호자가 다 있지’ 하며 조금 조급해졌습니다. ‘오늘 잠은 잘 수 있을까?’ 괜히 기분이 상했습니다. 애기 엄마가 애기 상태를 묻습니다. “아까 애기 아빠에게 다 설명을 드렸는데요.” 조금 짜증이 담긴 목소리가 나왔다. “아빠가 간단한 애기 치료를 하나 결정하지 못하나요?” 나는 인턴 선생에게 “봉합하기로 결정이 되면 병동으로 연락해 주세요.” 옆에 있던 간호사에게 얘기를 했다. 그리고는 휙 돌아서서 계단으로 올라갔다.
 
한 시간 쯤 더 지났을까. 세상은 암흑으로 덮여있던 그 시간에 갑자기 계단이 소란스러워지며 10명도 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누가 아까 우리 애기 봤어. 당신이야?” 애기 할아버지 같았습니다. 내가 당황하는 사이 그 분은 제게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멱살을 잡았습니다. 그러더니 제 주위로 가족들이 삥 둘러섰습니다. “그러고도 니가 의사야?”
 
마침 데이트를 마치고 온 닥터신이 아니었다면 나는 맞아서 쓰러졌을지도 모릅니다. 고맙게도 닥터신은 무조건 내편을 들었습니다. “왜 이러세요. 무슨 잘못을 했다고.” 나만 조용했습니다. 그러더니 나를 데리고 저쪽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애기 할아버지는 한 동안 제게 욕을 하시더니 “애기 데리고 가자.” 하셨습니다. 마치 썰물이 빠져나간 양 사람들이 사라졌습니다.
 
‘이렇게도 의사를 몰라주나.’ 바쁘고, 잠 못자고, 환자에게 멱살 잡히고. 그래서 의사는 더러운 직업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게 한 편으로 제 잘못입니다. 의사는 힘들어도 환자에게 잘 해야 하는 사람이니까요. 앞으로 다시는 환자에게 멱살 잡히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제가 애기 아빠였어도 너무 당황해서 애기 이마를 봉합해 달라는 얘기가 차마 떨어지지 않았을 거에요. 그러니까 서로의 입장을 거꾸로 보면 됩니다. 환자는 의사의 피곤함을 이해하고, 의사는 환자의 고통을 함께 느낀다면 얼굴 붉힐 일은 많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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