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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진 교수의 눈 이야기 -81

관리자 | 기사입력 2013/08/08 [12:24]

이성진 교수의 눈 이야기 -81

관리자 | 입력 : 2013/08/08 [12:24]

정감(情感)이 넘치는 병원

1년 전만 해도 우리 병원 안과는 38년 동안 38평에서 지냈습니다. 개인 의원보다 작은 공간을 이리저리 쪼개가며 땅굴을 파듯 살았지요. 그래도 우리는 그리 많이 부족함을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공룡 같은 대형병원들이 하늘을 향해 몸을 솟구칠 때도, 코앞에서 800평도 넘는 거대한 전문병원이 독수리처럼 날개를 펼칠 때도 말입니다. 다만 놀고 있는 공간을 우리에게 조금만 떼어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며 부러운 눈길을 보낸 적은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우리가 얼마나 초라하게 지냈는지 알게 된 일이 생겼습니다. 큰 병원 안과를 다니다가 우연히 우리 안과를 방문한 한 환자가 진료 후 어떤 말을 남긴 것 때문이었지요. “이 교수님께서 설명을 잘 해 주셔서 고마웠어요. 그런데 죄송하지만 안과는 좀 창고 같아요.” 누가 들으면 안 될 것처럼 속삭이며 얘기를 하셨고, “아. 예. 좀 그렇지요.” 저는 갑자기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 분은 눈 속 필름(망막)의 중심점(황반)에 문제가 생기는 황반변성 환자였습니다. 황반변성은 대개 망막 아래에서 생긴 신생혈관이 망막을 뚫고 자라 들어와서 출혈이나 부종을 일으켜 시력을 소실시키는 병입니다. 원인이 되는 신생혈관을 제거하기 위해 눈 속으로 항체를 주사하는 치료가 필요하다고 설명을 드린 직 후였는데 과연 ‘창고’로 다시 오시라고 하는 게 맞는지 자신이 없었습니다. 인사를 드리면서 어디서든 치료를 잘 받으셔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한동안 저는 자괴감에 전공의들에게 ‘창고로 모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환자분이 약속된 날에 주사를 맞으러 오셨습니다. 저는 큰 병원들이 가까이 있는 곳에 살고, 고위공직자의 가족이고, 누가 봐도 VIP인 그 분이 다시 오셨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매 달 맞는 주사를 한 번도 거르지 않았고, 황반변성은 다행히 조금 호전되었습니다. 저는 슬쩍 “어떻게 창고로 다시 오셨나요?” 하고 묻자 그 분은 웃으면서 “제가 몇 달간 순천향을 다녔잖아요. 그런데 순천향은 다른 병원에 없는 게 하나 있더라구요.” “네? 그게 뭐에요?” 저는 무슨 안 좋은 게 또 있는지 살짝 긴장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건 정감이에요.” 하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저는 안도하며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했습니다.

저는 정감이 아마도 다정다감(多情多感)하다는 말과 유사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확실히 알고 싶었습니다. 먼저 다정다감을 네이버 사전에 찾아보았지요. 거기는 ‘정이 많고 느낌이 많다는 뜻으로 생각과 느낌이 섬세하고 풍부함을 이르는 말’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그리 정이 많지도, 느낌이 별로 섬세하거나 풍부하지도 않다고 생각했는데 무엇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하셨는지 궁금했습니다.
 
이번엔 정감(情感)이란 말을 다시 찾아보았지요. 그것은 ‘정조(情操)와 감흥(感興)을 불러일으키는 느낌’으로 나와 있었습니다. 저는 정조와 감흥이 무슨 뜻인지 더 궁금해졌습니다. 사전에 정조는 ‘진리, 아름다움, 선행, 신성한 것을 대하였을 때에 일어나는 고차원적인 복잡한 감정’이라고 되어 있었고, 감흥은 ‘마음 속 깊이 감동받아 일어나는 흥취’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이 두 단어를 환자에게 적용시켜서 풀이해 보면 이렇습니다. 환자가 의사를 만나서 설명을 들은 후 마음에 어떤 복잡한 감정이 생겼고(정조), 이 만남을 통해 감동을 받아 마음 속에서 일어났던 복잡했던 감정이 어떤 기쁨으로 변했다(감흥)는 것입니다.

이 분이 제게 과연 그런 느낌을 받으셨다고 하면 제게는 아주 과분한 일입니다. 정이 많고, 섬세하고도 풍부한 느낌을 받으셨다고 해도 고마울 따름입니다. 그렇지만 저 때문에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작고 오래된 대학병원을 다니면서 큰 병원에서 느끼지 못했던 다른 감정들을 느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작은 건물, 옛날 방식의 시스템, 부족한 편의시설, 세련되지 못한 응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사들을 오래 기다려야 하고 설명도 제대로 듣지 못한다는 불만이 남아있는 이 병원 속에서 열심히 자신의 맡은 환자들을 정감 있게 돕고 있는 직원들을 본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것이 맞는 말이라면 ‘정감’은 우리와 같은 중소 대학병원의 경쟁력 중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환자가 진리, 사랑, 봉사를 모토로 하는 우리 병원에 왔을 때 다른 곳에서 느끼지 못하던 어떤 새로운 감정을 느끼게 해 주고, 그것이 감동으로 다가와 기쁨이 되도록 해 주는 것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경쟁력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정감어린 순천향, 정감 넘치는 우리 안과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아가서 환자들에게 더욱 다정다감한 대한민국의 모든 병원, 의사, 간호사, 직원들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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