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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진 교수의 눈 이야기 -30

관리자 | 기사입력 2012/06/11 [11:36]

이성진 교수의 눈 이야기 -30

관리자 | 입력 : 2012/06/11 [11:36]

색맹의 섬 (Island of the Colorblind, 1999)

영국 출신으로 옥스퍼드 의대를 마치고 현재 콜럼비아대학 메디컬센터의 신경학과 교수인 올리버 색스(Oliver Sacks, 1933- )는 과연 전색맹이 있는 사람들이 온통 잿빛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극단적인 신경질환을 겪는 환자들의 임상사례를 통해 인간 정신의 이면을 탐구한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써서 뉴욕타임즈가 의학계의 계관시인이라고 부를 정도로 유명한 문필가이기도 합니다.
 
색스는 어릴 때부터 종종 편두통이 심해질 때 색각 이상에 시달리곤 했는데, 일시적으로 색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험은 그에게 두려움과 색맹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색맹인 사람들만이 모여 사는 섬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안과의사 로버트 와서먼(Robert Wasserman)과 색맹이면서 색맹전문가인 노르웨이 출신 크누트 노르드뷔(Knut Nordby)와 함께 태평양 한가운데에 있는 마이크로네시아의 조그만 섬 핀지랩(Pingelap)으로 향합니다.
 
핀지랩은 한 쪽에는 근사한 쪽빛 바다가 펼쳐져 있고, 열대초목이 사방으로 무성한 다른 쪽 숲에서는 흑인아이들이 꽃과 바나나 이파리를 흔들면서 뛰노는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핀지랩은 세상과 완전히 고립된 섬은 아니었으며 소수의 색맹 인구가 다수인 정상 색각 인구 안에 섞여 사는 사회였습니다. 보통 색맹은 망막의 시각세포에 선천적인 이상이 발생하여 색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 유전병입니다.
 
적록색맹과 같은 부분색맹은 남성 20명당 1명 정도로 흔하지만 원뿔시각세포가 손상되어 전혀 색을 구별하지 못하는 전색맹은 3-4만 명에 1명으로 매우 희귀합니다. 그런데 핀지랩에서는 1/3이 무스쿤 유전자 보유자이며, 전체 인구 700명 중 57명이 전색맹인데, 무려 인구의 1/12나 되는 점이 특별합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200년 전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곳은 세습왕 난음와르키가 다스리던 곳이었습니다. 복잡한 계급제도, 구전문화와 신화, 그리고 그들만의 언어가 있었지요. 그러나 1775년 태풍 렝키에키가 이 섬을 덮치면서 1,000명의 인구는 100명으로 줄어들었고, 나머지도 기근에 시달리다가 죽어갔습니다. 20명의 생존자들은 생존을 위해 대대적인 근친교배를 행했으며, 그 과정에서 희귀한 유전적 특징인 ‘마스쿤(안 보인다)’ 즉 색맹이 생겼습니다.

핀지랩과 폰페이에서 만났던 마스쿤 주민들 간에는 뚜렷한 하나의 관련성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보자마자 곧바로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했으며, 언어와 지각 능력에도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크누트에게도 적용이 되었습니다.
 
색스는 크누트가 색맹이기에 겪어야 하는 이곳 원주민들의 아픔과 제약에 안타까워하는 것을 보았으며, 그것을 보완하는 풍부한 명암과 질감의 세계의 이점에 감탄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파라다이스와도 같은 이국의 풍광과 동식물에 매혹되면서도 그곳이 겪은 식민 수난의 역사와 사람들의 애틋한 사연에 함께 아파했지요. 

이곳에서 태어난 아기가 빛을 볼 때 눈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리면 그 아기가 지각하는 세계가 어떤 것인지, 그 아기에게 필요한 환경은 어떤 것인지, 그 아기의 특별한 능력은 무엇인지를 사회 전체가 이해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다른 곳에서 전색맹은 워낙 소수인 까닭에 어렸을 때부터 또래 아이들의 오해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그들은 중증장애인으로 고립된 삶은 살아야 하지만 여기서는 누구도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인지하는 세상은 다른 감각에 의해,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습니다. 마스쿤 여인이 어두운 방에서 짠 전통 무늬 깔개를 보게 되는데, 이 깔개는 어둠 속에서 독특한 빛을 발합니다. 정교한 무늬들이 서로 다른 밝기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 깔개를 환한 밖으로 가지고 나오는 순간 아름다운 무늬들은 사라져버립니다. 연한 갈색과 자주색처럼 명도의 차이만 있을 뿐 색채 대조가 별로 없는 색깔들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섬이라는 특수한 장소가 바깥세상으로 열리면서 사람들은 죽거나 다른 종족과 결혼하여 유전적 특성은 희소해졌습니다. 머지않아 세상에서 유일한 색맹의 섬은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입니다. 마치 소외된 자들의 정신적인 쉼터 혹은 낙원이, 그들이 유지하고 있던 색맹 공동체의 따뜻한 정서와 공감대와 함께 사라지는 느낌입니다. 그렇지만 이 세상 어딘가에 이런 특별한 섬이 또 존재할지 모른다는 사실이 삶의 위안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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