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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세동점과 동양 3 국
후생신보 기사입력  2015/03/16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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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수전 교수(인제의대)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알아차리기 보다 남을 보고서야 비로소 나의 문제를 보다 쉽게 알게 되고 그럼으로써 앞으로 나아갈 바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전기를 마련한다. 그래서 남과 비교하여 자신의 문제를 파악하는 비교 역사학, 비교 정치학, 비교 인류학 등의 학문이 정립되어 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나와 남이 다르지 않은 필연적인 것과 나만이 가진 고유한 것들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누가 뭐라 하더라도 15세기부터 본격화한 서세동점의 시대의 연장선상에 있는 점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가 현재 입고 있는 복장이나 현대적인 과학과 정치나 경제 체제가 무자비한 강탈과 압박에 의한 서구의 식민지배와 세계화에 대한 항전과 생존의 결과로 형성된 현실인 것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우리나라가 대응해 온 역사는 중국이나 일본 그리고 베트남의 방식과 같지 않으며 그 과정에서 엄청난 역사의 차이가 존재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나라들 중에 과거 시험 체제를 통한 인재의 등용을 하였던 나라는 한국(고려-조선)과 중국(수-당-송-원-명-청)과 베트남(레 왕조-막 왕조- 응웬 왕조)뿐이다. 일본은 과거 시험을 치른 적이 없었다. 그런 만큼 한국과 중국과 베트남은 과거 시험에 걸맞는 유학의 보급과 유학의 전통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런데 15세기 콜롬버스(1451-1506)에 의한 이른바 ‘신대륙’의 발견(1492년)과 그 이후에 벌어진 대항해시대(15세기~18세기)의 결과 일어난 서구세력의 아시아에 대한 식민지/반신민화의 결과는 아시아 세계의 모습을 그 이전과 이후가 판이하게 달라지게 하였다.
 
사실 대항해 시대로 언급되는 서세동점의 시작은 종교적인 선교 열정을 표피로 하여 향료 무역과 같은 경제적인 동기가 주요한 동인이었다. 지금은 일상 생활에 거의 언급되지 않는 정향과 육두구 등 갑비싼 향료가 인도네시아의 향료제도(몰루카 제도)에서 유래하였지만 유럽 사람들은 인도에서 오는 것으로 이해하였고 보다 더 이익을 얻으려면 인도와 직접 무역을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여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려고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경쟁적으로 노력하여 아메리카 항로와 인도 항로를 열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서세동점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항해는 국가의 재정 후원과 가톨릭 교단의 열정이 결합하여 대포를 포함한 해상 무력의 발전과 함께 세계화-식민지화의 시대로 나아가게 되었다.

중국은 명나라의 영락제(1360-1424 재위: 1402-1424) 시절에 정화(1371-1435)를 비롯하여 남해 원정대를 1405년 보낸 이래로 1433년까지 콜럼버스에 80여년 앞서 대항해를 하였다. 당시 대항해의 흔적이 지금의 자바, 말레이반도, 스리랑카, 인도를 거쳐 소말리아, 케냐에 까지 이러렀다.
 
그러나 막대한 국가 예산(국가 재정의 1/3)을 투입하고도 황제에게 바칠 기린을 데려온다든지 하는 것들은 경제적으로 수지가 맞지 않았으며 중국의 육지를 중시하고 바다를 경시하는 전통과도 상이하여 결국은 영락제의 사후 사라지고 항해기록들은 인멸되기에 이르렀다.
 
명나라가 운남을 정복함에 따라 명나라의 환관이 된, 대대로 무슬림교도였던 색목인 정화는 명나라 조정의 신료들과 이질적이었고, 그의 대항해는 당시의 해상 무역을 주도하였던 이슬람 커넥션을 이용하였기에 중국의 전통과는 사뭇 다른 점이 있었고 이후 전통세력에 의해 대항해 기록의 철저한 인멸이 진행되어 그 이후의 중국사에서 거의 잊혀진 인물이 되었지만 2008년 중국 북경 올림픽의 개막식에서 화려하게 부활하여 나타났다.

사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가장 인구가 많았던(거의 1 억 인구) 명나라는 가톨릭 교단의 가장 우선적인 선교 대상지가 되었고 거의 천 명에 이르는 유능한 선교사들이 중국으로 파송되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마테오 리치(1552-1610)가 중국 마카오에 도착한 것은 1582년 이었다. 그 이후 1601년에 북경에 입성하여 천주실의 등을 집필하였고 천문학,역법, 수학 지식으로 중국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러한 전통은 청나라에도 이어져서 지금의 국립 천문대에 해당하는 흠천감의 책임자인 유송령(Hallerstein) 포우관(Gogeisl)을 홍대용이 만나 천문학에 대한 지식을 교유하기도 하였다. 정말 기라성 같은 당애의 가톨릭의 지성들이 중국을 상대로 포교하기 위하여 명/청을 상대로 노력하였지만 천문학과 역법(캘린더)을 비롯한 한정된 분야에 머물고 중국의 유학체계를 변화시키지는 못하여 결국 청말에 양무운동과 변법자강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지만 중국은 서구에 대해 반(半)식민지화에 이르게 되었다.

사실 명나라를 개국한 태조 홍무제는 대외 교역을 무척 싫어하여 해금(海禁) 정책을 추진하였고 17세기 청나라의 강희제가 동남연해에 강해관,절해관,민해관,월해관의 4개의 세관을 설치하여 무역을 허락하였으나 1857년 건륭제는 광동의 월해관만 남기고 다른 해관을 폐쇄하여 ‘일구통상’정책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제도는 영국이 아편전쟁에 이겨 대외 개방을 요구하기까지 계속 이어졌다. 유일한 광동 월해관에는 독점적 상인들을 배치하여 이른바 ‘광동 13행’이라 하였으며 이들 광동 13 행을 통하여 서양과 중국사이에 교역이 이루어졌다.
 
이들 광동 13행의 인물들 중에는 서구를 이해하고 통찰력이 뛰어난 인물들이 많았으나 청나라로 볼 때는 하위 관직에 불과하였고 청나라의 황제나 고위 관료들은 서구인을 직접 접촉하려 하지 않아 청나라는 한정된 개방을 하였으나 실제적으로 철저하게 쇄국 정책을 유지하였다. 그리고 아편전쟁으로 영국에 참패하기까지 포르투갈/네덜란드/영국 등 중국에 내왕하는 서구인들의 세력판도 변화에도 무심하였으며 문제가 생기면 대행자인 광동 13행을 압박하여 해결하였으므로 서구세력에 대해 정말로 무지하였다.

일본은 처음으로 접근한 포르투갈 세력에 대해 한정적으로 나가사끼를 개방하였고 포르투갈 선교사에 의해 가톨릭의 포교가 성행하자 1637년 사마바라의 난을 계기로 포르투갈과의 교류를 중단하고 네덜란드로 파트너를 교체하였고 교류 지역도 나가사끼 앞 바다에 120 x 80 m 의 아주 조그만 인공섬인 데지마로 한정하였으며(1641년) 이후 220년간 지속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한정된 교역 속에서도 포르투갈, 네덜란드어를 일본어로 번역하였으며 특히 의학 방면에는 네덜란드의 해부학을 번역한 <해체신서>가 유명하였다. 일본은 쇄국을 유지하였지만 교역과 학문교류를 위한 숨통은 터 놓았고 미래의 서세동점과 제국주의 침략에 대비한 포석을 깔아 놓은 셈이 되었다.

그에 비해 조선은 명나라의 쇄국/ 해금 정책을 답습 모방하여 해금 정책을 실시하고 교역은 명/청과의 조공무역과 일본과의 왜관/통신사 교류로 한정하였으며 그 외의 나라 사람들이 오게 되면 중국이나 일본으로 추방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예외적으로 1653년 제주도에 표착한 하멜의 경우 당시 효종이 추진한 북벌정책에 대한 보안유지을 위하여 중국이나 일본으로 추방하지 않고 억류하였던 것을 제외하고 서구와의 직접적인 교류는 금하였다. 이것은 고려시대 벽란도를 통하여 아라비아 상인을 비롯한 외국 상인들이 내왕하는 국제적인 무역이 성행한 점과 비교된다.
 
고려를 개창한 태조 왕건이 해상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상인 가문 출신이란 점과 개방적인 대외 환경을 생각한다면, 조선을 세운 이성계(1335-1408)는 100년간 원의 지배를 받던 쌍성 총관부 출신의 무장이었고 사대를 명분으로 위화도 회군이란 쿠데타를 통해 집권하였고 한양을 수도로 삼은 점 등으로 본다면 처음부터 쇄국을 추구하였다는 점은 분명해진다.
 
다만 서구세력과는 직접 교류를 금하였기에 처음부터 서세동점에 대해 알 수 없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청나라가 아편전쟁으로 서구에 무너질 때 조차 조선의 세도정치 세력(순조~철종)들은 강 건너 불로 생각하였다. 오히려 일본이 청나라보다 더 빨리 아편전쟁의 본질을 파악하였고 그에 대한 대비를 강구하였다.
 
그리고 조선은 서구와 직접 부딪힌 1866년 병인 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에 대해 충격을 받았지만 일시적인 것에 그쳤고 일본이 1875년 운양호 사건을 일으켜 조선에 대해 불평등 조약을 강요하였을 때 비로소 본격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물론 조선 통신사들이 일본을 방문하여 오사카와 에도의 번성함을 보았지만 조선의 대외 교류정책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였다.

조선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왕조의 교체와 시스템의 전환을 필요로 하였지만 오히려 임진왜란 이후 보수적인 유학 시스템을 더 강화하여 다양성과 개방성을 더 금지하였다. 그리고 1875년 강화도 조약을 강요 받기 전까지 발상의 전환을 이루지 못하였고 조선의 최대의 시스템적 약점인 노비 철폐 문제 조차도 일본의 압박에 의한 1894년의 갑오경장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진 점을 본다면 내부적인 자정 능력의 결핍은 심각하였다.
 
왜냐하면 조선 사람들은 조선이 그렇게 숭앙하였던 명나라에 노비가 별로 없다는 사실은 보지 않으려 하였다. 명나라는 태조 주원장이 정한 민간인의 신분을 민호, 군호, 장호로 구분하여 국력의 동원이 용이하게 조직하였다.
 
왜냐하면 노비는 세금과 국방 정책의 사각 지대였으며 국가의 자원을 동원하기 위하여 그리고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타파하여야 하는 제도 1 순위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조선은 심한 노비 종모법등을 시행하여 조선 초기에 인구의 약 1/3이였고 이후에도 변동이 있었지만 30~40%수준을 유지하였다.
 
그리고 중국에 대한 안보 우산에 의지 하였으나 청나라가 아편전쟁으로 서구에 무너지진 이후에도 자주 국방에 대한 방향전환을 하지 못하였고 망국의 길로 접어들었다. 다만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를 통한 서구 학문이나 천주교의 도입을 추진하였으나 소현세자의 실각과 천주교도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으로 인해 좌절되었다.

한중일 삼국을 비교한다면 일찍부터 서구와 교류한 중국은 천문,역법에 국한하여 서구 학문을 받아들였고 일본은 한정된 지역에 국한하여 교류/교역하였으나 주체적으로 파트너를 선정하였고 서구를 번역 이해하였으며, 한국은 문을 닫아 걸고 중국 일변도의 교류만 하였다.
 
어떻게 본다면 일본의 경우 종의 생존이 변화의 가장 자리에 있다는 사실에 부합하는 면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체제의 유지를 위한 지속성과 변화를 위한 융통성의 조화를 생각한다면 한중일 3 국 중에서 일본만이 근대화에 성공한 점이 돋보인다 할 것이다.
 
베트남의 경우 응웬 왕조(1802-1945)의 경우 프랑스 등의 외국과 일찍부터 교류하였지만 서구의 근대적인 무력 앞에 20여년간의 항전에도 불구하고 식민지(보호국)로 전락한다. 그러나 베트남의 응웬 왕조는 그 이전 어떤 왕조보다도 더 유교적인 체제를 갖추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상부 체제의 경직성이 서구적인 근대화를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중국의 경우 식민지가 아니고 반식민지가 된 배경에는 가장 큰 세력인 영국이 가진 여러가지 여건으로 인해 반식민지 상태가 대영제국의 이해에 가장 부합하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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